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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프랭크 로이트 라이트가 건축한 낙수장 분석해보기
    건축이 궁금해 2022. 9. 18. 10:57

     

    프랭크 로이트 라이트가 

    건축한 낙수장 분석하기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는 미국 건축가입니다. 그의 생애는 크게 3개의 시대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스승 설리반을 떠나 1910년까지 제 1의 황금시대, 1910년부터 1935년까지 상실의 시대, 그 후로는 제 2의 황금시대라 할 수 있습니다. 이 낙수장은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가 황금시대로 들어가게 되는 시점입니다.

     

     

     

    누가 설계를 의뢰했나요?

     

    1935년 피츠버그의 백화점 소유주인 커프먼은 부유한 사장이었습니다. 그는 예술과 건축에 관심이 있어 라이트에게 펜실베이니아 서부 산 속에 자신과 가족을 위한 휴양용 별장을 지어달라고 의뢰하였습니다.

     

    커프먼 가족은 폭포와 숲 속을 좋아하였고 자신들의 집도 이러한 입지의 아름다움을 반영하기를 원했습니다.

     

     

     

    낙수장의 영감은 자연으로부터

     

    프랭크-로이드-라이트-낙수장

     

    라이트는 그 때 베어런 계곡에서 흐르는 물, 바위 덩어리들, 노출된 경사면, 단층이 보이는 산기슭, 자생하는 수목, 식물의 모습 등을 자세히 관찰하고 실측조사를 지시했습니다. 라이트는 자연을 누구보다 사랑하며 자연으로 많은 계시를 받은 건축가였습니다.

     

    특히 낙수장에서 대지가 가진 여러 조건을 놀라울 정도로 건축물에 부합되고 있어 그의 작품 중 가장 자연과 잘 조화되는 건축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자연은 프랭크에게 많은 영감을 주어 자연에서 유추된 형태들이 그의 건축조형의 기본이 되었습니다.

     

     

     

    집에다 캔틸레버를 사용한 장본인

     

    낙수장-캔틸레버

     

    우선 외부를 본 라이트가 즐겨 말하던 것이 있습니다. 낙수장은 "웨이터의 손바닥에 얹힌 쟁반"처럼 수직으로 서 있는 돌탑에 고정되었습니다. 캔틸레버로 받쳐진 쟁반들(발코니)에는 창문틀이 금속으로 된 유리 창문이 연이어 달렸고, 방과 열린 발코니 공간들이 들어섰습니다.

     

     

    그는 처음으로 주거 건축에 콘크리트 캔틸레버를 사용했다는 점이 주목받습니다.

     

     

    돌기둥과 벽은 캔틸레버 위에 서게 하고, 흐르는 개울위로 솟아 있는 바위에 기초를 세웠습니다. 가장 인공적인 캔틸레버의 수평면과 가장 자연적인 돌의 수직면이 잘 조화된 건축조형으로 그 자체가 밀접한 조화를 갖습니다.

     

    나뭇가지의 캔틸레버 원리를 이용하여 뿌리로부터 뻗어나게 하고, 재료의 자연미를 최대한 추구하는 구조입니다. 

     

     

     

    프레리 양식, 자연과 하나되는 건물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는 프레리 양식을 발전시켰다고 하는데요,

     

    그 양식이란 자연 자재를 사용해 천장이 낮은 건물의 벽 위에 아무런 지지물 없이 떠있는듯한 지붕이 특징입니다.

     

    그는 이미 제1 황금시대에 그 스타일을 확립했다고 합니다.

     

    낙수장-옥외계단

     

    외부를 보면 1층 서쪽 테라스에서 2층으로 올라가는 조각 같은 형태의 옥외 계단입니다. 뒤쪽의 돌로 쌓은 벽과 선명한 대조를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유리벽은 실내와 숲 사이에 경계벽이 없다는 사실을 강조하였습니다.

     

    이런 들락날락 거림은 건물의 볼륨을 주었고 내외 공간의 유동성을 가지게 됩니다.

    낙수장의 매력 중 하나는 수평선과 수직선이 조화되어 미묘한 균형감을 가지면서 어색하지 않게 풍경과 어우러진다는 점입니다.

     

    수평선은 계류의 수면이 대변하고 수직선은  흘러내리는 폭포가 대변합니다. 라이트는 수직, 수평을 지배하는 자연 풍경 속에서 자신이 구성한 수평선과 수직선의 새로운 질서를 정확한 스케일로 끼워 넣었던 것입니다.

     


    라이트는 이 건물에서 노자의 상선약수와 예수님의 야생들꽃을 완벽히 구현했습니다.

     

    노자의 도덕경 11장에는 <건물의 실체는 사방의 벽과 지붕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둘러싼 주거 공간에 있다>라는 말이 나오는데 라이트는 이 빈공간의 정신을 낙수장에서 구현했습니다.

     

    야생들꽃은 마태복음 6장 28절에 나온 것으로 건물의 유기적 단순성을 설명해주는 비유입니다. <들꽃은 수고도 길쌈도 하지 않으나 완벽한 아름다움을 갖고 있는데> 바로 그런 들꽃의 아름다움을 이 건물에서 구현한 것입니다. 

     

     

     

     

    실내 중심에 있는 큰 바위


    이제 내부를 보겠습니다. 그는 콘크리트 받침대를 써서 집을 바위 위에 고정시켰습니다. 그러나 상징적인 고정 장치는 집안에 있는 거대한 바위입니다. 이 바위는 넓은 거실 안에 들어 있으며 벽난로가 조심스럽게 붙어있습니다.

     

    라이트의 습관대로 천장은 방의 크기에 비해 낮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크기에도 불구하고 방은 시골풍의 친밀함이 있습니다. 

     

     

     

     

    일본으로부터 영향

     

    풍부한 호두나무로 선반과 낮고 넓은 테이블도 만들었습니다. 돌 바닥 위에 깔린 동양적인 카펫과 모피, 가죽 양탄자는 풍요로운 실내분위기를 만들었습니다.

     

    낙수장-일본

     

    이런 까닭은 라이트는 1906년 일본을 방문하게 됩니다. 그는 일본의 예술과 동양철학이 자신의 생각과 흡사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의 유기적인 것이 일본건축에 잘 맞았던 것입니다.

    일본 예술 정신의 핵심으로 받아들이게 된 것은 일본의 판화를 접하면서부터입니다.

     

    일본은 결코 자연을 모방하지 않고, 자연의 형태를 미묘하게 추상화하는 방법을 알고 있었습니다. 라이트는 일본 문화에 영향을 받았기 보다는 그가 믿어온 바로 그 원칙의 긍정적인 면을 보았습니다.

     

     

     

    기타

     

    현장 주위에서 모은 돌에 왁스를 발라 지은 한 층은 테라스 출입구로 연결됩니다. 그 출입구에서 시냇물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이 나 있습니다. 주변의 환경과 냉담한 유럽식 건물과 달리 라이트가 낙수장에서 구사한 슬래브들은 현장의 거친돌과 자연적인 무늬결과 색깔 등을 통해서 땅과 실제적으로나 상징적으로나 연결되게 해줍니다.

     

    낙수장-벽난로


    벽난로에 대해 자세히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돌로 쌓아올린 벽난로의 벽은 실제로도 바닥을 뚫고 올라온 바위와 직각으로 맞물리도록 구축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건물이 사면으로 미끄러지는 힘을 구조적으로 차단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건물의 중심 기둥이라고 할 수 있는 이 벽체에 네 개의 벽난로 굴뚝이 설치되고 그 외에도 급수나 배수, 전기, 가스 등의 각 배관류와 기계실에서 나오는 보일러의 배기 굴뚝이 전부 여기에 모여 있었습니다. 이 벽난로는 2층의 부인실 3층의 서재 난로와 이어지기도 합니다. 

    본채 뒤쪽의 높은 곳에 있는 게스트 하우스는 본채가 준공된 지 2년후인 1939년에 완성되었습니다. 이전에는 이 장소에 간소한 작은 별장들이 세워져 있었습니다. 건물의 일부는 주차장, 그 상부는 고용인의 방으로 되어 있습니다. 게스트 하우스는 거실 침실 욕실 화장실로 되어 있어 상당히 명쾌한 구성을 갖고 있습니다. 

     

     

     

    현재 낙수장은 관광코스가 되다

     

    낙수장은 완성되기도 전에 벽에 금이 가고 구조적 결함들이 나타났습니다. 커프먼은 별도로 다른 곳에 엔지니어링을 의뢰하였고, 이에 격노한 라이트는 공사를 그만두겠다고 으름장을 놓았습니다. 그러나 건물이 지은지 60년이 지나 마침내 거의 붕괴되기에 이르렀습니다.

     

    저질러진 많은 잘못과 필수적 재료가 생략된 사건들이 몇십년 후 보수 공사를 할 때 비로소 발견되었습니다. 결론적으로 낙수장 디자인의 성공적인 시공은 오늘날의 재료와 기술이 있어야 할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낙수장


    커프먼이 세상을 뜨자 에드가 카우프만 2세는 이 집을 수년 동안 사용하며 훌륭하게 유지했습니다. 그는 1963년에 집과 부지를 펜실베이니아 관리위원회에 기증하여 국가적 상징물이 된 이 저택은 주요한 관광코스가 되었습니다.

     

     

     

    정리 및 생각

     

    자연을 사랑한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를 만나 볼 수 있었던 시간이었습니다. 건축물도 그 자연의 일부가 되기를 바란 것 같습니다. 실제로 낙수장을 보면 참 아름다울 것 같습니다.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에 대해서 더욱 알고 싶어지네요.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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